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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흰 소

    학교 다닐 때부터 좋아하던 그림 그리기, 그리고 결혼

    이중섭(李仲燮) 19164 10일 평안남도 평원군 조운면 송천리 742번지에서 태어났습니다. 이중섭은 부유한 지주의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1920년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외가에 맡겨졌고, 평양의 종로보통학교를 다녔습니다. 어릴 때부터 밥 먹는 일보다 그림 그리기를 더 좋아했고, 소질도 뛰어났습니다. 학교 공부는 잘하지 못해서 평양고등보통학교에 응시했으나 낙방하고 대신 평안북도 정주군으로 내려가 오산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오산고등보통학교에서 프랑스 유학파인 미술교사 임용련(任用璉) 선생님을 만나 지도를 받았습니다. 1935년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의 제국미술학교에 입학했으나 1년 후 친구 김병기와 문학수가 다니던 일본 문화학원 미술학부로 옮겼습니다. 문화학원의 분위기는 전위적이고 자유로웠고, 이곳에서 수학하면서 이중섭은 야수파의 자유롭고 강렬한 묘사를 선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문화학원에서 훗날 부인이 되는 마모토 마사코(한국명 이남덕)를 만났습니다. 문화학원 재학 중 일본 미술 공모전에 출품하여 주목을 받았고, 1940년 미술창작가협회전에서 협회상을, 1943년에는 태양상을 수상했습니다. 이때 출품작이 <소와 어린이>인데, 이중섭이 즐겨 다루던 향토적인 소재가 이른 시기 등장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944년 귀국하여 함경남도 원산에 머무르며 작품을 준비했고, 이듬해 마모토 마사코와 원산에서 결혼했습니다. 1946년 첫 아이가 태어나지만 병을 앓다가 죽었고 이중섭은 큰 충격을 받고 실의에 빠졌습니다. 1947년 해방기념전람회에 죽은 첫아이를 기리는 <하얀 별을 안고 하늘을 나는 어린이>를 출품하여 호평을 받았습니다.

     

    전쟁 때문에 가족과 떨어져 힘들게 살다가 생을 마감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이중섭은 전국을 전전하며 불안정하고 궁핍한 생활을 연명했습니다. 1950 12월 어머니를 남겨두고, 두 아들과 조카, 아내를 데리고 부산으로 내려왔습니다. 그렇게 부산으로 피난을 오기는 했지만, 남한에 의지할 만큼 형편 좋은 친척이나 지인이 없는 이중섭으로서는 생계가 막막했습니다. 본래 이중섭은 남부러울 것 없는 환경에서 자란 부자 출신이라 남에게 신세를 지고 산 적이 없다 보니, 자연히 남에게 폐를 끼치거나 신세를 진다는 행위를 아주 싫어하고 어쩌다 신세를 져도 어떻게든 갚아야만 하는 성격이어서, 어느 정도 뻔뻔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전시 상황이 상당히 낯설었습니다. 게다가 부유한 환경에서 자란 예술가여서 험한 막일을 해가며 돈벌이를 하는 데에도 능숙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중섭을 대신해 부인 이남덕이 거리로 나서 재봉질을 해가며 돈을 벌었습니다. 1951 1 15, 정부의 수용피란민 소개 정책으로, 그나마 조카 이영진이 있어 연고가 있다는 제주도로 보내졌습니다. 1952년 종군화가단에 입단하여 활동했으나, 부인은 생활고에 시달리다 두 아들을 데리고 일본으로 이주하였습니다. 1953년 동경에서 가족들과 해후했지만, 다시 홀로 귀국하였고 이후 다시 가족들과 만나지 못했습니다. 이후 이중섭은 통영, 대구, 진주, 서울 등지에 머물며 <> 연작과 <부부> 등 걸작들을 쏟아내기 시작했습니다. 개인전을 개최하며 활발한 작품 활동에 몰두하는 한편 아내와 아이들에게 그림을 그려 보내며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달랬습니다. 그러나 후배의 배신과 사기로 생활이 궁핍해졌고, 건강이 악화되어 1956년에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의 '소'는 고통을 표현하기도 하고 때때로 희망과 힘을 표현한다

    이중섭의 "황소"는 그의 작품 중에서도 특히 강한 인상을 남기는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힘과 생명의 에너지를 상징하는 황소를 중심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그는어릴 때부터 소를 좋아했다. 소를 보며 마음의 평화를 얻고, 소에선 순수한 한국의 냄새가 나기 때문에 소를 좋아한다고 말했습니다. 이중섭은 황소를 통해 한국인의 강인한 생명력을 표현하고자 했으며, 이는 그의 개인적인 고난과 국가적 격동기를 겪으면서 더욱 부각되었습니다. "황소"에서 눈에 띄는 첫 번째 특징은 강렬한 선과 단순화된 형태입니다. 이중섭은 굵고 직선적인 선을 사용하여 황소의 힘과 역동성을 강조했습니다. 이러한 선의 사용은 황소의 근육과 움직임을 생동감 있게 묘사하는 데 기여하며, 작품 전체에 강렬한 에너지를 부여합니다. 황소의 눈은 특히 주목할 만합니다. 그의 눈은 깊은 슬픔과 동시에 결의에 찬 눈빛을 담고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감정을 공유하게 만듭니다. 또한, 이 작품은 색채의 절제된 사용이 특징적입니다. 대체로 흑백으로 처리된 이 작품은 황소의 강한 이미지를 더욱 부각시키며, 간결하지만 강렬한 시각적 효과를 만들어냅니다. 왼쪽으로 향한 얼굴은 공간을 장악한 느낌을 자아내고, 코와 입가의 선연한 붉은색 및 배경의 붉은 노을은 작가의 비극적인 내면을 담아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는 이중섭의 독특한 스타일을 보여주는 중요한 요소로, 불필요한 장식을 배제하고 본질적인 표현에 집중하는 그의 예술 철학을 반영합니다.

     

    한 인간의 삶과 시대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중요한 문화적 유산

    이중섭의 예술적 특징 중 하나는 그의 작품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주제들입니다. 황소, 가족, 자연은 그의 작품에서 자주 등장하며, 이는 그가 평생 동안 추구한 예술적 주제들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주제들은 그의 개인적인 경험과 깊은 연관이 있으며, 이를 통해 그의 작품이 가진 감동과 깊이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의 작품에는 상징적 주제와 민족적 정서가 깊이 스며들어 있습니다. 그는 한국인의 삶과 정서를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소재를 자주 사용했습니다. "황소"는 힘과 끈기의 상징으로, 한국인의 강인한 생명력을 나타냅니다. 또한, 그는 가족과 자연을 주제로 한 작품들을 통해 개인적 경험과 감정을 표현했습니다. 예를 들어, "아이들과 게"에서는 가족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을 서정적으로 담아냈습니다. 이중섭은 자신의 작품을 통해 당시 한국 사회가 겪었던 고난과 역경을 반영하고, 이를 극복하려는 의지를 드러냈습니다. 또한, 이중섭의 작품에서는 일본과 서양 미술의 영향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는 일본에서 유학하며 서양의 표현주의와 일본 전통 미술을 접목한 독특한 스타일을 개발했습니다. 그의 작품에서는 이러한 영향이 뚜렷하게 나타나며, 한국적 정서와 세계적 미술 트렌드의 융합을 보여줍니다. 그의 예술은 단순한 미술 작품을 넘어, 한 인간의 삶과 시대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중요한 문화적 유산입니다. 이중섭의 예술적 특징은 그의 개인적인 고난과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는 일본 유학 시절부터 시작된 가난, 가족과의 이별, 한국 전쟁의 혼란 속에서 힘든 삶을 살았습니다. 이러한 경험들은 그의 작품에 깊은 영향을 미쳤으며, 그는 자신의 고통과 슬픔을 예술로 승화시켰습니다. 그의 작품은 이러한 개인적 경험을 반영하면서도, 이를 통해 보편적인 감동을 전합니다. 이는 그의 예술적 열정과 삶의 이야기가 그의 작품에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